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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네비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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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네비츠 전투는 1813년 9월 6일,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 시도에 맞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기병 부족과 지휘 체계의 혼란을 틈타 승리했으며, 이는 독일 내 반(反) 나폴레옹 정서를 확산시키고, 바이에른의 전쟁 이탈, 작센군의 연합군 합류를 이끌어 라이프치히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승리자들은 훈장을 받았으며, 특히 뷔로프는 데네비츠 백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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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네비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알렉산더 베테를링의 그림, 1842년
알렉산더 베테를링의 그림, 1842년
전투 명칭데네비츠 전투
독일어 명칭Schlacht von Dennewitz
다른 독일어 명칭Schlacht bei Jüterbog (유터보크 근처 전투)
전쟁나폴레옹 전쟁 중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독일 전역
날짜1813년 9월 6일
장소베를린 남쪽
좌표좌표: 51°58′00″N 13°00′00″E
결과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21px]] 프로이센 왕국
[[파일:Flag of Russia.svg|22px]] 러시아 제국
[[파일:Naval Ensign of Sweden.svg|25px]] 스웨덴
교전국 2[[파일:Flag of France (1794–1815).svg|22px]] 프랑스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Württemberg (1806-1819).svg|22px]] 뷔르템베르크
지휘관 및 지도자
연합군 지휘관[[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21px]]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뷜로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21px]] 보기슬라프 프리드리히 에마누엘 폰 타우엔치엔
[[파일:Naval Ensign of Sweden.svg|25px]] 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프랑스군 지휘관[[파일:Flag of France (1794–1815).svg|22px]] 미셸 네
[[파일:Flag of France (1794–1815).svg|22px]] 니콜라 우디노
병력 규모
연합군 병력80,000–85,000명, 150문
프랑스군 병력45,000–70,000명, 200문
사상자 및 피해
연합군 피해9,700–11,000명
프랑스군 피해20,000–23,215명, 53문
추가 정보
연합군 세부 피해사상자 9,000명
포로 2,000명
프랑스군 세부 피해사상자 10,000명
포로 13,500명

2. 배경

1813년 8월,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전쟁 이탈을 목표로 수도 베를린 공략을 지시했다. 우디노 원수 휘하의 프랑스군은 베를린으로 향했으나, 스웨덴 왕세자 샤를 요한이 이끄는 연합군 북부군에 의해 8월 23일 그로스베렌 전투에서 저지당했다. 우디노는 비텐베르크로 후퇴했고, 이에 나폴레옹은 네 원수에게 지휘권을 맡겨 공세를 이어가도록 했다.

그로스베렌데네비츠에서의 프랑스군 및 연합군 이동 경로

2. 1.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 시도

1813년 8월,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수도 베를린 점령을 위한 전반적인 공세를 명령했다. 베를린과 주변 지역은 스웨덴 왕세자 샤를 요한(구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의 지휘 아래 프로이센, 러시아, 북독일, 스웨덴 군대로 구성된 연합군 북부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우디노 원수가 지휘하는 3개 군단은 베를린을 향해 세 갈래의 별도 도로를 따라 분산되어 진격했다. 연합군 북부군은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동서 축을 따라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8월 23일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본질적으로 블랑켄펠트(Blankenfield), 그로스베렌(Grossbeeren), 스푸텐도르프(Sputendorf) 세 곳에서 벌어진 고립된 작전이었지만, 이는 그로스베렌 전투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경우 연합군이 프랑스군보다 우세했고, 우디노 원수는 결국 비텐베르크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네 원수에게 지휘권을 인계받아 작전을 계속 진행하도록 명령했다.

2. 2. 연합군의 대응

1813년 8월 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려는 목표로 수도 베를린 점령을 위한 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원수 니콜라 우디노가 지휘하는 3개의 군단이 세 갈래로 나뉘어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를린과 그 주변 지역은 스웨덴 왕세자 샤를 요한(과거 프랑스 원수였던 베르나도트)의 지휘 아래 프로이센, 러시아, 북독일, 스웨덴 군대로 구성된 연합군 북부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북부군은 전투에 대비하여 동서 축을 따라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8월 23일, 프랑스군과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블랜켄펠트(Blankenfield), 그로스베렌(Grossbeeren), 스푸텐도르프(Sputendorf) 세 곳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으나, 통상적으로 그로스베렌 전투로 알려져 있다. 세 곳의 전투 모두 연합군이 프랑스군에 비해 우세한 상황에서 진행되었고,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패배로 우디노 원수는 비텐베르크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미셸 네 원수에게 지휘권을 넘겨 작전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3. 전투의 전개

9월 6일,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 약 5만 8천 명은 다시 베를린 공략을 시도했다. 네 원수는 전군을 하나의 도로로 이동시켜 신속히 진격하려 했으나, 이는 병력이 길게 늘어서는 문제를 야기했다. 데네비츠에서 프랑스군은 스웨덴 왕세자 카를(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이 총지휘하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마주쳤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812년 러시아 원정 이후 겪고 있던 심각한 기병 부족 문제와 우디노 원수가 네 원수의 지휘 하에 놓인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지휘 체계의 불안정 등 여러 약점을 안고 있었다. 네 원수는 충분한 정찰 없이 서둘러 진격하여 준비된 연합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실수를 범했다.

전투는 초반부터 프랑스군과 연합군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양측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황이 여러 차례 뒤바뀌었다. 뷜로브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단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냈고, 전투 중 네 원수가 직접 전선에 나섰다가 전술적 상황을 오판하여 내린 명령이 우디노 원수에 의해 퇴각으로 잘못 해석되면서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결정적인 순간,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연합군 주력 부대가 대규모 포병 지원과 함께 전장에 도착하여 후퇴하던 프랑스군의 좌익을 강타했다. 이미 프로이센군의 압박에 밀리고 있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총공세에 완전히 붕괴되어 궤주했다. 연합군은 다음 날까지 추격을 계속하여 프랑스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최종적으로 프랑스군은 병력 23,215명, 대포 53문, 군기 4개, 군용마차 413대를 잃는 참패를 당했으며[1],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 시도는 최종적으로 좌절되었다.

3. 1. 프랑스군의 초기 진격

원수는 약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9월 6일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재개했다. 그는 나폴레옹드레스덴 근처 남동쪽에서 지원할 것이라고 잘못 예상하고, 베를린 남동쪽 방향으로 먼저 이동하여 진격하려 했다. 네는 전군을 단 하나의 도로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군대의 집결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병력이 수 마일에 걸쳐 길게 늘어서는 결과를 낳았다.[1]

스웨덴의 왕세자 카를 요한(과거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은 그로스베렌 전투에서 우디노 원수의 첫 공격 당시 프랑스군이 베를린 남쪽의 제한된 남북 도로에 분산되었던 것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연합군이 프랑스군과 접촉하면 교전하여 시간을 벌고, 나머지 병력이 동서 도로와 개활지를 이용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방어 계획을 세웠다.

네의 군대가 데네비츠에 도착했을 때, 북쪽에서 접근하던 프로이센의 뷜로브 장군이 이끄는 제3군단과 충돌했다. 당시 유터보크에서 네의 진격을 막고 있던 프로이센의 타우엔치엔 장군과 뷜로브 군단의 합류를 막기 위해, 프랑스군은 데네비츠 북쪽 고지(현재의 데크말스베르크, 기념비 언덕)를 점령하려 했다. 초반에는 타우엔치엔 군단이 밀렸으나, 뷜로브 군단이 고지를 점령하면서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어진 브란덴부르크 용기병의 돌격은 주저하던 프로이센 부대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뷜로브 기념비


이 전투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약점이 드러났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여파로 기병 전력이 심각하게 부족하여 정찰과 적군 차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지휘 체계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우디노 원수는 네 원수의 지휘를 받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네 원수는 충분한 정찰 없이 서둘러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고, 이는 프랑스군이 준비된 연합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프랑스군은 초반에 용맹하게 싸워 타우엔치엔 군단을 후퇴시키기도 했으나, 뷜로브 군단의 지원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프로이센군과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후 뷜로브 장군이 두 프로이센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전투는 주도권이 여러 차례 오가는 혼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네 원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으나 전장의 모래바람 때문에 전술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 원수는 우디노 원수에게 예비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는데, 네 원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우디노는 이를 퇴각 명령으로 잘못 해석하여 병력을 뒤로 물렸다. 이를 본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이 후퇴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3. 2. 프로이센군의 저항과 연합군의 지원



9월 6일, 프랑스네 원수는 약 5만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베를린 공격을 시도했다. 그는 드레스덴 근처 남동쪽에 있는 나폴레옹의 지원을 기대하며 동쪽으로 먼저 이동하여 베를린 남동쪽에서 진격하려 했으나, 이는 잘못된 예상이었다. 데네비츠 근처에서 네의 군대는 스웨덴 왕세자 카를(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이 총지휘하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마주쳤다.

네 원수는 전군을 하나의 도로로 이동시켜 병력을 집결시키려 했으나, 이로 인해 프랑스군 행렬은 수 마일에 걸쳐 길게 늘어졌다. 이는 연합군 사령관 베르나도트가 예상했던 상황으로, 프랑스군의 후속 부대 도착과 연합군의 증원이 엇갈리며 전투 양상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의 패배로 인한 심각한 기병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는 적의 동태 파악이나 퇴로 차단에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우디노 원수가 네 원수의 지휘를 받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어 지휘 체계도 불안정했다. 네 원수는 충분한 정찰 없이 성급하게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잘 준비된 연합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타우엔치엔 장군은 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유터보크에 주둔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데네비츠 북쪽의 고지(현재의 데크말스베르크)를 점령하려 할 때, 뷔로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3군단이 도착하여 타우엔치엔 군단을 지원했다. 뷔로 군단은 고지를 점령하고 브란덴부르크 용기병을 돌격시켜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이를 통해 초반에 흔들렸던 프로이센군은 재집결할 시간을 벌었다. 뷔로 장군은 이후 전투가 끝날 때까지 프로이센 군단의 지휘를 맡아 효과적으로 프랑스군에 맞섰다.

전투는 한쪽이 우세를 점했다가 다시 밀리는 시소 게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는 듯 보였으나, 네 원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지만, 전장에 불어닥친 모래 바람 때문에 전술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우디노 원수에게 예비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는데, 네 원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우디노는 이를 퇴각 명령으로 오인하여 병력을 뒤로 물렸다. 이를 본 프로이센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싱켈이 만든 전투 기념비


결정적인 순간,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러시아 군단과 스웨덴 군단 등 4만 5천 명 이상의 연합군 주력 부대가 전장에 도착했다. 연합군은 150문의 대포와 영국 윌리엄 콩그리브 경이 지휘하는 콩그리브 로켓 포대까지 동원하여 프랑스군에게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 지원 하에 70개 보병 대대와 1만 명의 기병이 이미 프로이센군의 압박으로 후퇴하던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했다.

강력한 정면 압박과 측면 공격을 동시에 받게 된 프랑스군은 완전히 무너져 궤주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과 스웨덴 기병은 다음 날까지 끈질기게 추격하여 프랑스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투 자체에서 프랑스군은 약 1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로이센군은 약 9,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1] 하지만 이후 추격전에서 프랑스군은 1만 3천 명의 포로를 추가로 내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군은 토르가우에 도착했을 때 병력 23,215명, 대포 53문, 군기 4개, 군용마차 413대를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네 원수는 베르티에에게 "나는 완전히 패배했으며, 아직 나의 군대가 재집결했는지 알 수 없다"고 보고할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3. 3. 프랑스군의 패배

원수는 약 5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9월 6일 다시금 베를린 공격을 시도했다. 그는 드레스덴 근처에 있던 나폴레옹이 남동쪽에서 지원할 것이라 잘못 예상하고, 베를린 남동쪽으로 진격로를 잡았다. 그러나 데네비츠에서 스웨덴의 왕세자 카를(과거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이 총지휘하는 프로이센-러시아-스웨덴 연합군과 마주쳤다. 스웨덴 왕세자 카를은 그로스베렌 전투에서 우디노 원수의 첫 공격 당시 프랑스군이 베를린 남쪽의 몇 안 되는 남북 도로에 분산된 것을 보고 함정을 준비했다.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주력과 접촉하는 부대가 시간을 벌면, 나머지 군대가 동서 도로와 개활지를 이용해 결정타를 가하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네는 전군을 하나의 도로로 이동시키려 했다. 이는 군대를 집결시키는 장점도 있었지만, 수 마일에 걸쳐 병력이 길게 늘어서는 단점을 낳았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 후속 부대나 연합군 지원군이 도착할 때마다 전황이 네 번이나 뒤바뀌었다.

프랑스군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패배로 기병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적의 퇴로를 차단하거나 정찰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우디노 원수가 네 원수의 지휘를 받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어 지휘 체계도 불안정했다. 네 원수는 제대로 된 정찰 없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준비된 연합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돌격하게 되었다.

타우엔치엔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 군단이 네의 진격을 막고 있던 유터보크 근처 데네비츠에서 양측은 충돌했다. 프랑스군은 타우엔치엔과 뷜로브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 제3군단이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네비츠 북쪽 고지, 현재 Denkmalsberg|데크말스베르크de(기념비 언덕)로 알려진 곳을 점령하려 했다. 초반에 타우엔치엔 군단이 피해를 입었지만, 북쪽에서 접근한 뷜로브 군단이 고지를 점령하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어서 브란덴부르크 용기병이 고지를 돌격하여 주저하던 프로이센 부대가 재집결할 시간을 벌었다. 이후 뷜로브 장군이 두 프로이센 군단의 지휘를 맡아 전투를 이끌었다.

전투는 어느 한쪽이 우세를 잡았다가 다시 빼앗기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군이 용맹하게 싸워 한때 승기를 잡는 듯 보였으나, 네 원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고, 전장에 불어온 모래바람 때문에 전술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는 우디노에게 예비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는데, 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우디노는 이를 퇴각 명령으로 오해하고 병력을 뒤로 물렸다. 이를 본 연합군은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결정적인 순간, 스웨덴 왕세자 카를이 이끄는 북부군 주력(러시아 군단, 스웨덴 군단 포함 45,000명 이상)이 전장에 도착했다. 연합군은 150문의 대포와 윌리엄 콩그리브 경이 지휘하는 영국제 콩그리브 로켓 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붕괴된 프랑스군 좌익으로 진격했다.

이미 프로이센군의 압박에 밀려 후퇴하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와 측면 공격에 완전히 무너져 궤주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과 스웨덴 기병은 다음 날까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만 10,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추격전 과정에서 13,000명의 포로가 추가로 발생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군은 병력 23,215명, 대포 53문, 군기(Eagle) 4개, 차량 413대를 잃는 참패를 당했다. 연합군의 손실은 프로이센군 9,700명을 포함하여 약 1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1] 네 원수는 토르가우에 도착한 후 베르티에에게 "나는 완전히 패배했으며, 아직 나의 군대가 재집결했는지 알 수 없다"고 보고하며 패배를 인정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데네비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나폴레옹라인 동맹 독일 동맹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바이에른 왕국은 이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다른 독일의 군소 국가들도 프랑스 제국에 대한 지원을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 지배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던 독일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티롤에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독일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 연합군 북부군 사령관이었던 스웨덴 왕세자 베르나도트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작센 왕국 군대가 프랑스 편에서 이탈하도록 유도했다. 작센 군대는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 중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면서 나폴레옹의 결정적인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패배는 베를린을 점령하고 베르나도트 군대를 격파하려던 나폴레옹의 전략적 계획을 혼란에 빠뜨렸다. 나폴레옹은 직접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지만, 연합군의 효과적인 기동으로 인해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결국 라이프치히에서 총력전을 벌이게 되었다.

한편, 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라이헤르 폰 뷜로브 장군은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로이센 국왕으로부터 데네비츠 백작(Graf von Dennewitzde) 칭호를 수여받았다.

4. 1. 프랑스군의 피해

데네비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10,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고, 이는 약 7,000명의 사상자를 낸 연합군보다 많은 수치이다.

이러한 피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812년 러시아 원정 패배 이후 겪었던 기병 부족은 정찰과 적 퇴로 차단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우디노 원수네 원수의 하급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어 지휘 체계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네 원수는 정찰 없이 빠른 진격을 시도하다 연합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딪혔고, 전투 중 모래 바람 등으로 전술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네 원수가 예비대 구성을 명령한 것을 우디노 원수가 퇴각 명령으로 오인하여 병력을 물린 것은 결정적인 실책으로 작용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공세와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부대의 측면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궤주하였다.

4. 2. 연합군의 승리와 프로이센의 부상



데네비츠 전투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프랑스 지배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독일 전역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티롤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바이에른은 베를린 작전 실패의 결과로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후 다른 독일 국가들은 프랑스 제국에 대한 지원을 주저하게 되었다.

베르나도트는 이러한 독일 민족주의의 분위기를 활용했다. 그는 자신이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지휘했던 작센 군대에게 프랑스 편을 떠나 자신의 군대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그가 작센 군대 내에서 개인적인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센 내부의 불만은 상당했으며, 작센 장교들은 공개적으로 스웨덴 왕세자(베르나도트)를 칭송했다. 작센 국왕은 나폴레옹에게 군대의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각서를 보내야 할 정도였다. 결국 한 달 뒤, 작센군은 베르나도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라이프치히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 연합군 측으로 돌아섰고, 이는 프랑스의 패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계획을 완전히 뒤엎었다. 나폴레옹은 원수의 실패를 질책하고,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는 것을 넘어 베르나도트와 그의 군대를 슈트랄준트까지 몰아 바다로 내쫓으려는 새로운 작전을 직접 지휘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동맹을 와해시키려는 의도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옛 부하였던 베르나도트의 '배신'을 응징하고 스웨덴에서의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뷜로프와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그의 진격을 피하기 위해 기동했고, 서로 지원하며 나폴레옹이 어느 한 군대도 고립시켜 격파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에서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데네비츠 전투의 승리자들은 높은 영예를 안았다. 특히 프로이센의 뷜로프 장군은 전투에서의 뛰어난 지휘력과 용기를 인정받아 베르나도트로부터 스웨덴 검의 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프로이센 국왕으로부터 데네비츠 백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는 프로이센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베르나도트 역시 러시아 최고 권위의 성 게오르기 훈장 1등 대십자 훈장(당시 유일한 생존 수훈자), 프로이센의 신설된 철십자 훈장,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등 각종 최고 훈장을 받으며 그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4. 3. 독일 내 반(反) 나폴레옹 정서 확산

데네비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커지던 독일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패배 소식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 내 저항 정서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직후 바이에른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다른 독일의 군소 국가들도 프랑스 제국에 대한 지원을 주저했다. 티롤에서는 프랑스 지배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웨덴의 왕세자이자 연합군 북부군 사령관이었던 베르나도트는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자신이 1809년 바그람 작전에서 지휘했던 경험이 있어 개인적인 인기가 높았던 작센 군대에게 프랑스 편을 떠나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당시 작센 내부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으며, 작센 장교들 사이에서는 공개적으로 베르나도트를 칭송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작센 국왕은 흔들리는 군대의 충성심을 나폴레옹에게 재확인하는 각서를 보내야만 했다.

결국 한 달 뒤,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작센 군대는 베르나도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군 편으로 돌아섰고, 이는 나폴레옹 군대의 패배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데네비츠에서의 패배는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 점령과 베르나도트 군대를 북쪽 스트랄준트로 몰아내려던 나폴레옹의 전략적 계획에 큰 차질을 안겨주었다.

4. 4. 라이프치히 전투에 미친 영향

데네비츠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프랑스 지배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던 독일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티롤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바이에른은 베를린 공략 작전 실패의 여파로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후 다른 독일 국가들도 프랑스 제국에 대한 지원을 주저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왕세자이자 북부군 사령관이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러한 독일 민족주의 분위기를 활용했다. 그는 자신이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지휘했던 경험이 있어 개인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작센 군대에게 프랑스 편을 떠나 자신의 군대에 합류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작센 내부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고, 작센 장교들은 공개적으로 베르나도트를 칭송하기도 했다. 작센 국왕은 나폴레옹에게 군대의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음을 재확인하는 각서를 보내야 할 정도였다. 결국 한 달 뒤, 작센군은 베르나도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지던 결정적인 순간에 연합군 측으로 돌아섰고, 이는 프랑스가 패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데네비츠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계획을 크게 뒤흔들었다. 나폴레옹은 원수의 실패를 질책했으며,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고 베르나도트와 그의 군대를 슈트랄준트로 몰아 바다로 내쫓으려는 새로운 작전을 직접 지휘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사이의 동맹을 와해시키려는 의도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자신을 배신한 전 원수 베르나도트를 처벌하고, 그가 스웨덴 왕세자로서 얻은 명성을 깎아내리려 했다. 그러나 뷜로프와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그의 진격을 피하는 기동을 펼쳤다. 두 지휘관은 서로 지원하며 한쪽이 후퇴해야 할 때 다른 쪽이 진격하는 방식으로 나폴레옹이 어느 군대도 고립시켜 격파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러한 연합군의 성공적인 대응은 결국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5. 주요 인물

데네비츠 전투에는 양측의 주요 지휘관들이 참여하여 전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측에서는 베를린 공략을 목표로 한 미셸 네 원수와 그의 휘하에 있던 니콜라 우디노 원수가 군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선 연합군 측에서는 프로이센의 뷜로프 장군이 이끄는 군단이 전투 초반부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웨덴 왕세자이자 연합군 총지휘관 중 한 명인 카를 요한(베르나도트)이 전투 후반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여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5. 1. [[미셸 네]]

네 원수는 약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9월 6일 다시 베를린 공략을 시도했다. 그는 동쪽으로 먼저 이동하여 베를린 남동쪽에서 진격하려 했는데, 이는 드레스덴 근처에 있던 나폴레옹이 그 방향에서 지원해 줄 것이라고 잘못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웨덴 왕세자 카를(과거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이 총지휘하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은 그로스베렌 전투에서 우디노의 첫 공격 당시 프랑스군이 베를린 남쪽의 몇 안 되는 남북 도로에 분산되었던 것을 교훈 삼아 대비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프랑스 주력군과 접촉하는 부대가 교전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나머지 병력이 동서 도로와 개활지를 이용해 결정타를 가하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네는 전군을 단 하나의 도로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병력을 집결시키는 장점은 있었으나, 베르나도트가 예상했듯이 수 마일에 걸쳐 병력이 길게 늘어서는 결과를 낳았다. 뷜로브가 이끄는 프로이센 제3군단이 북쪽에서 네의 군대를 따라오다 데네비츠에서 충돌했다. 당시 타우엔치엔 장군의 프로이센 군단이 네의 베를린행 길목인 유터보크를 막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타우엔치엔과 뷔로의 합류를 막기 위해 데네비츠 북쪽 고지(현재 데크말스베르크, 기념비 언덕)를 점령하려 했다. 초반에는 타우엔치엔 군단이 피해를 입었으나, 뷔로가 고지를 점령하며 상황을 반전시켰고, 이어진 브란덴부르크 용기병의 돌격은 프로이센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전투는 당시 프랑스군의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참패 이후 심각한 기병 부족에 시달려 정찰 및 적 퇴로 차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우디노 원수가 네 원수의 지휘를 받게 된 것에 불만을 품어 지휘 체계도 불안정했다. 네 원수는 제대로 된 정찰 없이 최대한 빨리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고, 이는 프랑스군이 준비된 연합군 방어선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결과를 낳았다. 초반에 프랑스군은 용맹하게 싸워 타우엔치엔 군단을 후퇴시켰으나, 뷔로 군단의 지원으로 프로이센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이후 뷔로가 두 프로이센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전투는 주도권이 여러 차례 바뀌는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는 듯 보였을 때, 네 원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으나, 전장에 불어온 모래바람 때문에 전술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우디노에게 예비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는데, 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우디노는 이를 퇴각 명령으로 잘못 해석하고 병력을 뒤로 물렸다. 이를 본 프로이센군은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결정적인 순간,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스웨덴-러시아 연합군 본대(약 4만 5천 명 이상)가 전장에 도착했다. 연합군은 150문의 대포와 윌리엄 콩그리브 경이 지휘하는 영국제 콩그리브 로켓 포대의 지원 아래, 붕괴된 프랑스군 좌익으로 총공세를 펼쳤다. 이미 프로이센군의 압박으로 후퇴하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과 측면 공격에 완전히 무너져 궤주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전투 당일에만 10,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로이센군은 약 9,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1] 다음 날까지 이어진 프로이센과 스웨덴 기병의 추격으로 프랑스군은 추가로 13,000명의 포로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군은 토르가우에 도착했을 때 병력 23,215명, 대포 53문, 군기 4개를 포함하여 총 413대의 차량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네 원수는 비텐베르크에서 베르티에에게 "나는 완전히 패배했으며, 아직 나의 군대가 재집결했는지 알 수 없다"고 보고하며 참담한 패배를 인정했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의 베를린 공략 시도는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

5. 2. [[니콜라 우디노]]

데네비츠 전투 당시 프랑스군의 지휘 체계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우디노 원수는 자신이 원수의 하급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1] 이러한 내부 갈등은 전투 중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미쳤다.

전투가 한창일 때, 원수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느라 전장의 모래 바람 때문에 전술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우디노에게 예비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지만, 우디노는 이를 퇴각 명령으로 잘못 이해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1] 이는 네 원수가 우디노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지른 실수와 맞물려, 프로이센군이 공세를 강화하고 프랑스군이 결국 후퇴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5. 3.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라이헤르 폰 뷜로브|뷜로프]]



데네비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뷜로프(Bülow) 장군이 이끈 제3군단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유터보크 근처 데네비츠에서 타우엔치엔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단과 마주쳤다. 네의 군대가 데네비츠 북쪽 고지(데크말스베르크)를 점령하고 타우엔치엔 군단을 압박하던 중, 뷜로프의 군단이 때맞춰 도착하여 고지를 탈환하고 전세를 뒤집었다. 브란덴부르크 용기병의 돌격은 후퇴하던 프로이센 부대가 재집결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후 뷜로프는 타우엔치엔 군단과 자신의 군단을 통합하여 그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전체를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프랑스군은 기병 부족과 우디노 원수와 네 원수 간의 불화로 인한 지휘 체계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네 원수가 전장의 혼란 속에서 내린 예비대 편성 명령을 우디노 원수가 퇴각 명령으로 오인하면서 프랑스군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뷜로프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강력한 공격과 이후 도착한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연합군 본대의 합세로 완전히 붕괴되어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뷜로프는 '데네비츠 백작'(Graf von Dennewitz)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5. 4. [[스웨덴의 카를 14세 요한|카를 요한]] (베르나도트)

스웨덴의 왕세자이자 전 프랑스 원수였던 카를 요한(베르나도트)은 데네비츠 전투 당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의 총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9월 6일, 원수가 이끄는 약 6만 명의 프랑스군이 다시 베를린을 공격하려 하자, 카를 요한은 데네비츠에서 이들과 맞섰다.

카를 요한은 이전 그로스베렌 전투에서 우디노 원수의 공격을 막아낸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이 베를린 남쪽의 제한된 남북 도로를 따라 분산되어 진격할 것을 예상하고 전략적인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연합군 군단들에게 프랑스군 주력과 마주치면 교전하며 시간을 벌고, 그 사이 나머지 병력이 동서 도로와 개활지를 이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네 원수가 실제로 전군을 하나의 도로로 이동시키면서 병력이 수 마일에 걸쳐 길게 늘어서자, 전투는 양측의 증원군이 도착함에 따라 여러 차례 전황이 뒤바뀌는 혼전 양상을 띠었다.

전투 후반, 프랑스군이 뷜로브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자, 카를 요한은 결정적인 순간에 전장에 개입했다. 그는 러시아 군단과 스웨덴 군단을 포함한 약 4만 5천 명 이상의 북부군 주력 병력과 함께 도착하여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특히 150문의 대포와 윌리엄 콩그리브가 지휘하는 영국의 콩그리브 로켓 포대를 동원하여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동시에 약 70개 보병 대대와 1만 명의 기병으로 이미 흔들리고 있던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했다.

카를 요한의 이러한 적시적인 개입과 강력한 공격은 이미 프로이센군의 압박으로 후퇴하던 프랑스군의 완전한 붕괴를 촉진했다. 전투 후 벌어진 추격전에서도 카를 요한 휘하의 스웨덴 기병은 프로이센 기병과 함께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1만 3천 명 이상의 포로를 잡는 데 기여했다. 카를 요한의 전략적 판단과 전투에서의 결정적 역할은 데네비츠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6. 전투의 의의 및 평가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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